홍길동 어린이를
박신진 목사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전도서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4절),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6절)는 것입니다. 찾는 것은 기쁜 일이고 무엇이든지 잃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은 후 슬픔으로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은 채 오래도록 애통하며 울었습니다(창37:34). 욥은 열 자녀와 많은 재물을 하루아침에 모두 잃고 슬픔 때문에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누가복음에는 15장이 잃은 것을 찾는 장이라 할 정도로 잃은 것에 대하여 연속적으로 적혀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 잃은 은전을 찾는 여인의 비유,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탕자로 불리는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부터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잃은 슬픔이 큰 것처럼 찾는 기쁨은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잃어버린 애장품이나 보석 때문에 마음 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래 전에 청소하시는 교인을 기억하는데 자기는 목욕탕 청소를 하다가 하수구에서 보석을 줍곤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을 찾아 돌려주려 하는데 대부분은 찾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걸 잃은 사람은 마음을 끓일 것입니다. 잃어버린 고향, 잃어버린 친구, 심지어 오래 전 어릴 적에 잃어버린 이름이 문제 되기도 합니다. 잃은 땅과 잃어버린 사랑을 그리워하는 노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열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보내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하셨습니다. 또 누가 10장에서는 따로 70인을 세워 둘씩 보내시며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제자들의 삶이란 전도의 삶이고, 가르치는 내용은 전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잃은 자를 찾는 운동”이 곧 “예수운동”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온 힘을 다해 총력 전도하여, 이 세상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분이요, 교회의 제일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잃은 양은 너무나 중요한 인생의 동반자이기 때문에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양은 인류에게 아주 중요한 가축입니다. 사람에게 가죽과 젖과 고기를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양과 함께 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양은 적을 공격하기에 무능하고 방어할 뿐입니다. 양은 몸에 비하여 달리는 근육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빠르지 못합니다. 토끼나 심지어 다람쥐보다 느립니다. 더구나 지독한 근시여서 멀리 오는 맹수를 보지도 못해서 달려들면 잡혀 먹이가 됩니다. 양은 한 데 모여 사는 동물입니다. 양이 이동할 때면 앞 양의 꽁무니에 머리를 대다시피 하고 줄을 서서 나아갑니다. 귀소본능이 강한 양은 갔던 길로 되돌아오는 데에 익숙하여 새로운 세계로 개척하여 진출하기가 어렵습니다.
양은 그래서 한데 모여있어야 하고, 목자의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목동출신이었던 다윗은 양의 생활에 익숙하여 그것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시편 23편이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은 목자와 함께 있을 때에만 쉼을 누리고 배부름을 얻습니다. 양처럼 인간도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77억 인구가 수십 번 멸망할 정도의 핵무기를 만들어 놓은 인간은 항상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이라는 병이 전염되니까,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라 전체가 벌벌 떱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이 있어야만 삽니다. 인류의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께는 불신자가 길 잃은 양입니다.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라고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양은 아무리 큰 소리 쳐도 소용없어요! 오직 목자에게 돌아와야 양은 삽니다. 아직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이웃과 친구는 다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들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고 목자에게 돌아오도록 기도합시다. 이제 부지런히 그 양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내일이면 늦습니다. 마지막 기회다 생각하고 그를 찾아가 열심히 전도합시다!
지금은 영적 추수철이어서 추수할 곡식이 많습니다. 더욱 전도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도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에 힘쓰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성도들 가운데 마치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복음에 영향을 주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 한 가지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의 이름을 높이기도 하고 깎아내리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정신을 차리고 복음을 수호하고 전파해야 합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복음이 전진했던 것처럼, 우리는 교회 부흥을 위해 어려움이 있어도 더욱 절제하고 깨어 기도하며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잃어버린 양’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명하시면서 어떻게 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첫째는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둘째는 ‘찾아내라’는 겁니다. ‘너희가 떠나기까지는 거기 머물라.’ 셋째는 ‘머물라’는 것이어요! 마지막 넷째는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즉 ‘복을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1) 들어가라
전도는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요, 성도가 해야 할 거룩한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영혼 구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는 열두 제자를 보내셨고 누가복음에는 70문도를 파송하여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누가10:2) 하심으로 전도 받을 사람들을 추수할 곡식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이나 추수할 곡식을 우리는 지나치면 안 됩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목자나 농부는 현장 노동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려면 전도현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하니 “여러분,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들어가십시오!” 주님은 아무 성이나 촌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려면 도시든지 농촌이든지, 사람 사는 마을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파트 지역은 낯선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주거지역도 방범을 위하여 낯선 자들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 삶을 영위하는 관계의 망들이 있습니다. 이 관계를 활용한 관계전도를 우리는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관계 속으로 복음을 가지고 들어가라!’ 하십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에 열중합니다. 마태는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누가는 들에 남겨 두고 나섰다고 합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이 중요합니까,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이 중요합니까? 숫자로는 아흔아홉 마리가 많고 중하지만, 전도를 위해서는 하나를 100으로 보는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다방다실을 설천하고 있을 줄로 믿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이 한 주일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여러분의 주위에 형성되어 있는 인간관계를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그를 만나서 꼭 주님께로 인도해내기를 축복합니다!
2) 찾아내라
우리는 전도대상자를 작정하여 써내고 지금 매일 400여 명의 사람들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총력전도주일은 어떻게 해서든 이들을 교회로 데리고 와서 복음을 들으며 예배에 참여하도록 하는 주일입니다. 그러나 전도주일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날들은 사실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데 치중해야 하는 날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주시고 믿음 주셔서, 사는 날 동안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어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전도주일에는 기필코 친구와 이웃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금지한 열매를 따먹고 스스로 눈이 밝아져 자신의 죄를 깨닫고 부끄러워 숨은 아담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반문하는 가인에게 잃어버린 동생을 계속 찾으십니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습니다. 무화과 숲에서는 나다나엘을, 가버나움 세관에서는 세리 마태를 찾아내시고 말씀하셨지요. “나를 따르라!”(마9:9)
바울은 빌립보에 갔을 때 그 성에 있던 자주장사 루디아를 찾아내어 그를 동역자로 삼아 유럽복음화의 첫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중국 최초의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오래 중국에서 신실한 선교활동을 한 결과 자기 집 요리사 한 사람을 구원해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멸망해갈 때 예루살렘에서 의인 한 사람을 찾지 못해 눈물을 펑펑 쏟아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시는 목자 예수님을 생각하며 여러분 주위에 있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도지를 가지고 찾아가고, 전도선물을 가지고 찾아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찾아가 만나면,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어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머물라
잃어버린 양을 찾는 세 번째 방법은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구하기 위해 이웃이 되어 하루를 주막에서 함께 머물렀습니다. 함께 머무는 것은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며 길벗이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으로 오시는 성육신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신 것이죠. 베다니에서는 마르다 마리아 자매와 함께 나사로의 집에 머물러 그들의 친구가 되셨고, 여리고에서는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시어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함께 머문다는 것은 상징적인 뜻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으나 유사이래 가장 외로움을 타고 있습니다. 영화 방송 인터뷰 SNS들이 다 혼자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혼밥족, 혼술족 붐이 일고 있습니다. 혼자 모든 걸 합니다. 그러나 외롭습니다. 함께 머물 동반자가 더욱 필요합니다. 함께 머물 수 있다면 유대인이 천민으로 여기는 사마리아인도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으나, 함께 머물 수 없다면 형제도 남이 될 것입니다.
다음 주 총력전도주일을 앞두고 여러분은 축호전도 같은 전도행사가 한번 쯤 있을 줄 알았을 텐데, 올해는 지역봉사주일로 지킵니다. 이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전도는 개인이 관계를 중심으로 만나고 방문하여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지역사랑을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1시간도 못되게, 정한 지역중심으로 쓰레기 줍는 일은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과 관심은 이렇게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진심을 담아 쓰레기를 주우시고 골목골목을 돌아보고 오십시오! 이것이 바로 ‘거기 머물라’는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지혜롭게 이웃과 머무르십시오! 함께 하는 길벗임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혼자 밥 먹고, 혼자 노느라 외로움에 찌든 이웃들에게 창을 열고 문을 열어 함께 머무는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좋은 인연을 만들어 보세요.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으로 그 이웃과 함께 할 때 잃어버린 양들이 돌아오고 기적과 같이 전도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4) 복을 빌어주라
우리는 잃어버린 양을 향해 나아가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세상에 복을 전해주도록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셔서 ‘너는 복이 될지라!’ 하신 하나님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자가 되도록 부르십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12절)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중보기도로 복을 빌어줄 수 있고 평화의 선물을 기원함으로 이웃에게 복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일꾼이며 평화의 전달자입니다. 기도의 힘은 크고 기도의 효과는 놀랍습니다. 그러니 평화를 빌고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 교회가 6주 전부터 전도대상자를 작정하고 기도하겠습니까? 기도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제가 영동지역 기도세미나에 참석했더니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하나님은 기도하면 그때 들어주시고 응답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들어주실 준비를 하시고, 이미 응답을 다 마련해놓으시고, 우리에게 기도하라 하시는 것이랍니다. 기도하는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겼고,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러니 기도하고 복을 비십시오! 그러면 그 빈 복이 그에게 임할 것이고, 그가 복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 복이 평안을 빈 사람에게 올 것입니다.
미국 LA에서 보험으로 엄청나게 성공한 안승화라는 분이 계셨는데, 보험 세일즈맨의 스타가 되어 표창을 많이 받았답니다. 고객이 자그마치 만명이나 되었다는데, 그의 놀라운 성공요인 중 하나는 그가 생일 카드로 매년 모든 고객들에게 복을 빌어주었기 때문이랍니다. 전도에도 정성이 들어갑니다. 여러분의 이웃에게 복을 빌어 주십시오. 복은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것입니다. 마침내 잃어버린 양들이 돌아오고 여러분의 전도의 열매를 가지고 전도 일꾼들이 받는 상급으로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양떼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고 또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모두 잃은 양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산길을 다니며 가시에 찔려 고생하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매고 돌아올 때, 하늘의 천군천사도 기뻐하시며 우리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전도는 기대했던 열매가 있거나 없거나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잘 되면 형제 구원이요, 안 되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과 상급을 주십니다. 참으로 귀중한 일은 전도자에게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고 숨겨진 평화가 있습니다. 약속된 큰 상급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받은 것 외엔 노벨상 수상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언젠가 여러 분야에서 노벨상을 타는 사람도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노벨상보다 더한 상은 전도상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성도 여러분은 결단코 그 상급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래 된 영화입니다만, ‘로베레장군’이라는 영화에서 레지스탕스들이 감옥에서 처형을 당합니다. 그때 억울하게 잘못 잡혀온 한 남자가 처형을 앞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레지스탕스가 아니다. 나는 장사나 하고 돈이나 벌며 살다가 잡혀 온 자이지 저항운동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다.” 그때 처형을 기다리던 다른 레지스탕스가 말합니다.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죽어 마땅한 점이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다. 수백만이 피를 흘렸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이제 조국과 민족은 멸망 직전에 놓여있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선지자 예레미야는 외치기를,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렘50:6) 하였습니다. 수많은 영혼이 잃어버린 양이 되어 어둠으로 달려갑니다. 가시덤불에 얽혀 피흘리며 부르짖고 있을 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양들의 울음소리를 못들은 척 한다는 것은 큰 죄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하) 고백하였습니다. 어서 속히 잃어버린 양을 구하러 나서십시오! 지금 전도의 일선에 서십시오!!
예수 안 믿는 내 가족, 교회 다니지 않는 내 친구 내 이웃은 그리스도에게 돌아와야 할 잃어버린 양들입니다. 지금 그들의 장막에 들어가십시오! 지금 찾아야 할 영혼을 찾으십시오! 지금 그들을 찾아가서 함께 머물면서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저주 아래 놓여있지 않도록, 어둠의 도시를 빨리 떠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양들을 찾는다면 세상에는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교회 안에는 함께 즐기는 잔치의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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